성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는 시선과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의 모든 만물을 바라보며 판단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을 살피며 만물을 바라보아도 거기서 하나님의 솜씨나 그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눈에 사물은 들어오고 그 눈에 세상의 모든 만물은 투영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여 일하시는 것을 알지 못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취하는 삶의 태도는 육신에 속한 일들을 바라보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가장 뛰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을 지으시고 그 아담에게 사명도 주시고 그리고 그 아담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지혜와 명철도 주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되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세상을 판단하되 하나님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능력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어를 바꾸면 하늘이 보인다."는 표어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만물을 주어로 삼고, 모든 판단과 결정에 근본적인 이유나 원인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의식구조와 판단의 주어는 '나'입니다. 여기서 주어인 나를 하나님으로 바꾸게 되면 모든 만물 가운데 창조주의 손길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우리가 생각하던 기준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꾸게 될 때 우리의 눈에 하늘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면 하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면 영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면 생명의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좁은 문이 왜 유익한지 알게 되고, 우리가 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목표가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의 시선은 만물을 바라보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아담에게 시선을 바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들짐승과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는지 보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후에 맨 먼저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을 지배하라'는 명령을 주신 후에, 아담이 처음 이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동물들을 보면서 이름을 짓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수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이것을 잘하는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살펴보고 계신다는 생각 속에 있어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의식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의식이 우리에게서 사라지면, 눈에 보이는 것과 내 속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을 좇아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계신다는 의식 속에 있게 되면 사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과 감당해야할 사명이 함께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존재와 사명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세우셨을 때, 그 존재와 그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사명을 주셨을 때, 아담은 성실하게 사명을 수행합니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적절한 이름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직관력과 통찰력이 있어서 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모든 동물의 이름과 특징이 정확하게 일치하면서 그 존재가 규명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동물들이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며 그 존재가 규명되었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주니라'(2:20)는 표현이 이름을 불렀다는 말과 같습니다. '카라'라는 동사는 '공표하다'는 의미와 함께 공적으로 선언하는 행위를 보여줍니다. 모든 동물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든 동물과 구별된 사람에게 돕는 배필을 지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뜻을 아담도 온 몸으로 느끼게 하십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에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아담이 이름을 지어준 많은 동물과 새들 중에서는 자기를 돕는 배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동물과 새들은 쌍쌍이 그 앞으로 지나갔지만 아담은 혼자였습니다. 온몸으로 혼자 독처하는 자신을 더 많이 생각하는 시간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외로움을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신 방법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셔서 하와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셨다'는 말씀을 보십시오. 단순히 잠든 것이나 자연적인 수면 상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상태로 깊이 잠든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마취된 자처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 후 그로 하여금 자기 몸의 일부인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아내를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그는 죽음을 경험한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아담에게서 하나님이 갈빗대를 취하고 그에게 배필을 허락하시는 이 과정을 확대해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담이 겪었던 절차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옆구리를 창에 찔리고 피를 흘리신 후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나타난 세상의 큰 변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세상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보는 시각이나 세상의 가치관 혹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을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분별의 지혜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죽기를 각오할 만한 것을 찾았는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필요할 때, 하나님은 아담을 거의 죽음을 방불케 하는 상황까지 내려놓으신 후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은혜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얻게 된 생명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향해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살리신 백성이 바로 교회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은 비싼 대가를 지불할 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생명을 얻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값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갈 각오와 준비를 하고 있어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은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도 믿음도 그리고 신앙적인 가치관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세상 만물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통하여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지체들, 나의 배우자, 주변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 가운데 존재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임무를 잘 수행하며 살아가려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해야 합니다. 만물을 바라보는 성도의 시선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철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