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그림을 감상할 기회가 있어서 전시장에 들어갔는데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것은 그림을 보는 자신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몰랐고 그림에 대한 사전 지식도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보기는 보는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감상해야 합니까?" 라고 말했더니, "그냥 보고 느끼는 대로 평가하고 감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별로 느끼는 것은 없고 제게는 그냥 그림이라는 큰 범주 안에 들어있는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이라는 것 밖에는 판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성경의 첫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는 천지창조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작품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우리의 눈앞에 표면적으로 펼쳐졌을 때 이것은 산이고, 강이고, 하늘이고, 동물이고,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나열하고 열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걸작을 다 감상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창조기사를 분석해서 첫째 날은 무엇을 만드셨고, 둘째 날엔 무엇을 만드셨으며...일곱째 날에는 쉬었다고 정돈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천지창조라는 제목 가운데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천지만물을 있게 하셨고 또 그것을 확인하게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작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인류구원의 과정을 서술하는 성경을 시작한 의도는 무엇인지 파악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그 만드신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라는 기사를 성경의 맨 앞에 두시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천지창조의 기사와 내용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모세오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기록된 성경 맨 처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기록이 나옵니다. 왜 맨 처음에 천지창조의 기사를 두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신앙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이 반쪽짜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선포했을 때, 처음 이 메시지를 들었던 청중들은 누구였습니까? 애굽에서, 바로의 압제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되고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모세가 선포한 메시지를 가장 처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이미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찾아오셔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정립되어 있지 못합니다.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은 애굽에 살면서 그 땅의 문화에 젖었습니다. 애굽의 문화는 다양한 신들과 많은 우상을 섬기는 문화였습니다. 거기서 살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에서 구원 받아 광야까지 나왔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애굽의 문화였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들의 신앙은 반쪽짜리 신앙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문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성도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떠난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과 올바른 믿음의 태도를 보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신앙의 터 위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바른 신앙도 바른 사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고 가야 합니다. 창조의 첫 시작을 알리는 선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능력의 하나님,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창1:1). 이것은 능력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지치고, 감당키 어려운 환란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주는 메시지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라는 선언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삶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신앙이 우리 속에 자리할 수 있어야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완전한 창조였습니다. 창조 후에 하나님이 쉬신 것은 완전한 창조를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7은 완전한 숫자인데 창세기 1:1절은 7개의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히브리어 성경 원문). "태초에 하나님이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시니라." 7개의 단어로 창조에 대한 첫 번째 선언을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다는 선언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예히 오르)." 그 다음에 성경은 똑같은 구절을 반복합니다. "빛이 있으라.", "빛이 있었다."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선포와 더불어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창조는 질서를 잡아가는 방법으로 정돈되고 있습니다. 혼돈(chaos)을 질서정연한 세상(cosmos)으로 만드셨습니다. 왜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노래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천지창조의 첫 단계는 창조의 선언을 듣고 있는 모든 청중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이 어둠 가운데 빠져서 죄 가운데 거하는 백성들에게 어둠 가운데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후에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빛과 어둠이 완전히 구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도들이 어둠 가운데서 빛 가운데로 나왔다면, 다시 어둠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면서 그리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중간지대를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간지대에서 떠나 빛 가운데로 들어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은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그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어둠 가운데서 벗어나서 빛 가운데로 나아오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도 빛이 있어야 합니다. 이 빛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가옵니다.
천지창조는 단순히 보이는 것을 창조하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자로 세우기 위한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배우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작품을 보고, 보이는 작품을 넘어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여 그의 뜻을 따라가는 믿음의 지체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