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 마실 물이 보이지 않는 힘든 상황에 처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 어디를 쳐다봐도 그들에게 필요한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광야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 선언하는 메시지에서 모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이 세상은 물로 가득 차있던 공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로 물을 올리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행하셨던 그 기적과 하나님이 베푸셨던 엄청난 일들을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의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다가가기 시작하면 오류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과학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이지 증명하거나 논리적인 서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지금도 모든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며 순종하는 자에게 창조주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광야에서 참담한 모습으로 살아가며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없는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진정한 위로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하늘도 만드시고 땅도 만드셨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척박한 환경에 처한 백성들의 진정한 '보증'(guaranty)이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스스로 어떤 행동의 양식을 결정하지 못하거나 환경의 제약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예배하지 못하며, 스스로 어떻게 할 수없는 상황에 빠질 때 그것으로 인하여 자괴감에 빠지거나 스스로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절망하고 좌절하거나, 원망하며 불평하기보다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광야 같은 환경에서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사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겠지만, 천지창조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위로가 되는 순간입니다. 창조기사를 통해서 그 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낮에 그들에게 온기로 다가오는 태양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달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별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기사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에도 처음에 나오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는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에 첫 번째 나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창조하신 후에 그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낮과 밤을 구별하셨습니다. 창세기 서두에서 이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짝을 이루고 나타납니다. '빛'과 '어둠'이, '낮'과 '밤'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들을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이름들을 지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하늘이라고 부르는 순간 영원히 하늘이 되고, 하나님이 땅을 땅이라고 부르는 순간 영원히 땅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물의 이름을 명명(命名)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에게 모든 사물의 소유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 하늘과 그 땅은 이름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르시니라'(히. 카라)는 동사는 '소리를 높여서 외친다'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한 세상은 그 이름으로 존재하는데,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화'(造化)와 '분리'(分離)라는 두 단어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 낮과 밤, 빛과 어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남자와 여자.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화를 통하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동시에 그 이름이 주어질 때 그 이름은 한계도 설정되었습니다. 낮과 밤의 한계, 빛과 어둠의 한계, 남자와 여자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이것을 차별이라고 말하지 않고 '구별'(區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명하신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별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구별을 외면하고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동성애라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화라는 것은 이름에 맞는 사명과 책임이 함께 부여된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 이름에 맞는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 19:1). 그 사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바는 '구별된 삶',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야할 목표는 가나안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그 땅 거민들과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천지인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과 구별되게 살아가야 하는 사실도 모세를 통하여 선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선언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 즉 구별은 다른 말로 '거룩함' 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구별하셨지 완전히 분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조화롭게 만드신 후 그것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분리하신 것은 조화를 위해서입니다. 이 조화를 통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모든 것들을 보게 하시고 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만물에 부여하신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고유한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책무와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생각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신 것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와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과 책임과 의무를 수행해야합니다. 모든 만물에게 부여된 고유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메시지가 창조기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증(保證)이 되신다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